크레인이 멈춰 선 공사장에서 읽는 인플레이션의 청구서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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2022년 서울 강동구 둔촌주공 재건축 현장에서 공사비 증액 갈등으로 타워크레인이 일제히 멈춰 섰던 사건이 떠올랐다.
단군 이래 최대 재건축이라 불리던 상징적인 사업장에서 수개월간 공사가 전면 중단되고 조합과 시공단이 소송전으로 치달았던 그 사태는, 당시만 해도 대형 사업장 특유의 이례적인 힘겨루기나 일시적인 진통 정도로 여겨졌다.
하지만 최근 들려오는 건설 현장의 소식들은 섬뜩하다. 둔촌주공에서 벌어졌던 그 파열음이 이제는 서울과 수도권의 주요 정비사업장은 물론, 지방 전역의 아파트 공사장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인 일상의 분쟁으로 번져나가고 있다는 뉴스를 들었다.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중견 건설사들이 감당 못 할 원가 상승을 견디지 못해 줄줄이 법정관리를 신청하고, 금융당국은 부실 부동산 PF 사업장의 옥석을 가려 공매로 넘기기 시작했다.
2022년 둔촌주공의 멈춰 선 크레인이 던졌던 경고음이 대한민국 건설과 금융 생태계 전체의 현실로 덮쳐온 꼴이다.
시멘트 한 포대가 깨어버린 장기 계약의 평화
자본주의 사회가 평화롭게 굴러가는 전제조건은 미래 가격에 대한 예측 가능성이다. 3년 뒤 아파트가 완공될 때까지 철근과 시멘트 가격, 인건비가 완만하게 움직일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야 시공사는 도장을 찍고 조합은 터전을 내어준다.
하지만 지난 몇 년간 닥친 글로벌 인플레이션은 그 평화를 일거에 박살 냈다. 시멘트와 레미콘 가격은 30%가 넘게 치솟았고 인건비는 천정부지로 뛰었다. 3년 전 책정했던 공사비로는 지으면 지을수록 적자가 쌓이는 구조가 되어버렸다.
흔히 사람들은 인플레이션이라고 하면 마트에서 장을 볼 때 사과 한 알, 라면 한 봉지 가격이 천 원 오르는 생활의 불편을 떠올린다. 그러나 진짜 인플레이션의 파괴력은 수천억 원짜리 장기 계약의 뿌리를 뒤흔드는 거대한 물리적 현장에서 터져 나온다. “계약서대로 지어라”는 조합의 외침과 “이 가격으로는 망해서 못 짓는다”는 시공사의 배수진 사이에서, 사회적 신뢰는 파편처럼 깨져 나갔다.
빚으로 땡겨온 장밋빛 미래의 청산
이 파열음을 지켜보며 내가 생각한 의미는 명확하다. 지난 10여 년간 초저금리와 유동성에 취해 미래의 분양 수익을 담보로 무리하게 빚을 땡겨 지었던 부동산 금융의 호시절이 완전히 끝났다는 점이다.
과거에는 공사비가 올라도 분양가를 더 높게 책정해 수분양자에게 비용을 넘겨버리면 그만이었다. 부동산 불패 신화가 유지되는 한 누구도 손해를 보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. 하지만 고금리가 장기화되고 가계의 대출 여력이 바닥을 드러내면서, 더 이상 비용을 전가할 출구가 막혀버렸다.
폭탄 돌리기의 마지막 손에서 음악이 멈춘 꼴이다.
비용 상승분을 누구도 떠안으려 하지 않자 크레인은 멈춰 서고, 그 아래 묻혀 있던 수십조 원의 PF 대출은 금융기관의 건전성을 위협하는 뇌관으로 돌변했다. 인플레이션이 남긴 청구서는 사라지지 않는다. 누군가는 손실을 확정 짓고 뼈를 깎는 디레버리징을 감내해야만 비로소 이 긴 터널의 끝이 보일 것이다.
성장의 환상에 취해 빚으로 미래를 앞당겨 썼던 시대가 저물고 있다. 멈춰 선 공사장의 타워크레인은 우리 경제가 감당해야 할 현실의 무게를 가장 차갑고 무겁게 웅변하고 있다.